냉장고에 과일과 채소를 정리하다 보면 이런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사과랑 채소는 같이 넣으면 안 돼.”
또 어떤 분들은 바나나를 다른 과일과 함께 두면 빨리 익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정말 과일 하나 때문에 옆에 있는 채소가 빨리 상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에틸렌(Ethylene)이라는 물질입니다.
다만 모든 과일이 에틸렌을 똑같이 많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모든 채소가 에틸렌에 똑같이 반응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농산물은 에틸렌을 많이 만들어내고, 어떤 농산물은 아주 적은 양의 에틸렌에도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오늘은 신선식품을 보관할 때 자주 등장하는 에틸렌이 무엇인지, 과일의 숙성과 채소의 품질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쉽게 알아보겠습니다.
에틸렌은 무엇일까요?
에틸렌은 식물이 자연적으로 만들어내는 기체 형태의 식물 호르몬입니다.
화학식은 C₂H₄이고 색과 냄새가 거의 없는 기체입니다.
식물에서는 아주 적은 양으로도 여러 생리반응에 관여합니다.
특히 과일의 숙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흔히 ‘숙성 호르몬’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에틸렌을 단순히 “과일을 상하게 만드는 나쁜 가스”라고 생각하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식물이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물질이며 과일이 정상적으로 익는 과정에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수확 후 저장과 유통 과정에서 에틸렌을 만드는 농산물과 에틸렌에 민감한 농산물을 함께 보관할 때 발생할 수 있습니다.
FAO는 수확 후 과일을 숙성 특성에 따라 구분하며, 사과·바나나·아보카도·망고·배·복숭아 등은 수확 후에도 숙성이 진행되고 에틸렌 생성과 숙성이 밀접하게 연관된 과일로 설명합니다.
바나나가 익으면서 에틸렌도 증가합니다
바나나는 에틸렌의 역할을 이해하기 좋은 대표적인 과일입니다.
덜 익은 초록색 바나나를 실온에 두면 시간이 지나면서 노란색으로 변하고, 과육은 부드러워지고 단맛과 향도 달라집니다.
이 과정에서 에틸렌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실제 상업적인 바나나 유통에서는 에틸렌을 이용해 숙성을 균일하게 진행하기도 합니다.
UC Davis 자료에 따르면 대부분의 상업용 바나나 품종은 15~20℃에서 24~48시간 동안 약 100~150ppm의 에틸렌에 노출시키는 방식으로 균일한 숙성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즉 에틸렌은 단순한 저장 방해물질이 아니라 농산물 유통에서 실제로 활용되는 중요한 물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채소에는 왜 문제가 될까요?
과일을 잘 익게 만드는 에틸렌이 모든 농산물에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일부 채소는 에틸렌에 상당히 민감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상추입니다.
UC Davis 자료에 따르면 아이스버그 상추는 에틸렌에 매우 민감하며 1ppm 정도의 에틸렌 노출만으로도 잎맥 주변에 갈색 반점인 러셋 스포팅(russet spotting)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로메인 상추 역시 에틸렌에 민감합니다.
에틸렌에 노출되면 품종과 조건에 따라 잎맥 주변의 갈색 반점이나 황화 등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틸렌 때문에 상추가 곧바로 ‘썩는다’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에틸렌에 노출되면 특정 생리반응이 촉진되어 외관과 상품성이 떨어질 수 있다
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사과와 상추를 같이 두면 안 된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습니다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과와 채소를 같이 보관하면 안 될까?”
사과는 에틸렌을 생성하는 과일이고, 상추는 에틸렌에 민감한 채소입니다.
그래서 장기간 같은 저장공간에 두는 것은 좋은 조합이 아닐 수 있습니다.
UC Davis의 로메인 상추 자료에서도 에틸렌 오염원으로 사과와 배 같은 에틸렌 생성 과일과 함께 저장하는 경우를 직접 언급하고 있습니다.
FAO 역시 농산물을 저장할 때 온도와 습도뿐 아니라 에틸렌 생성 여부와 민감도를 고려해 호환 가능한 품목끼리 저장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렇다고 사과 하나가 냉장고에 있다고 옆의 모든 채소가 바로 상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영향은 농도, 노출시간, 온도, 환기 상태, 농산물의 종류와 숙도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핵심은 에틸렌을 많이 만드는 농산물과 민감한 농산물을 장기간 밀폐된 공간에 함께 보관하는 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토마토도 에틸렌을 만들어냅니다
토마토 역시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마트에서 초록빛이 남아 있는 토마토를 사서 실온에 두면 점점 붉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토마토 역시 숙성 과정에서 에틸렌의 영향을 받습니다.
UC Davis 자료에 따르면 성숙한 녹색 토마토는 외부 에틸렌에 노출되면 숙성이 시작될 수 있으며, 익어가는 토마토 자체도 중간 수준의 에틸렌을 생성합니다.
그래서 UC Davis는 숙성 중인 토마토를 상추나 오이처럼 에틸렌에 민감한 농산물과 함께 저장하거나 운송하는 것을 피할 것을 권장합니다.
이 부분은 가정의 냉장고보다 여러 품목을 대량으로 취급하는 저장·유통 현장에서 더욱 중요합니다.
에틸렌을 만드는 농산물과 민감한 농산물은 다릅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확실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에틸렌을 많이 만드는 농산물 = 에틸렌에 민감한 농산물
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에틸렌을 생성하는 정도와 외부 에틸렌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는 서로 다른 특성입니다.
대표적으로 사과, 바나나, 배, 복숭아, 아보카도, 토마토 등은 숙성과 관련해 에틸렌을 생성하는 대표적인 농산물입니다.
반면 상추처럼 스스로 만드는 에틸렌의 양은 매우 적지만 외부 에틸렌에는 매우 민감한 채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장할 때는 단순히 ‘과일과 채소’를 구분하는 것보다
에틸렌을 많이 발생시키는 품목인지
그리고
에틸렌에 민감한 품목인지
를 확인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에틸렌에 노출되면 무조건 빨리 익는 것도 아닙니다
또 하나 흔히 오해하기 쉬운 부분입니다.
에틸렌에 노출된 모든 농산물이 바나나처럼 빨리 익는 것은 아닙니다.
농산물마다 반응이 다릅니다.
어떤 과일에서는 숙성이 촉진되고, 어떤 채소에서는 황화나 갈색 반점 같은 품질 저하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FAO는 많은 잎채소와 오이·풋콩·완두 등 미성숙 상태에서 먹는 채소들이 완전히 성숙하기 전에 최적의 식용품질에 도달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농산물에서는 과일의 숙성과 같은 방식으로 에틸렌을 이용할 이유가 없습니다.
즉 에틸렌의 영향은
“숙성을 빠르게 한다”
한 문장으로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농산물의 종류에 따라 숙성, 노화, 황화, 연화 또는 생리장해 등 서로 다른 반응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온도가 낮으면 에틸렌 문제도 줄어들까요?
온도 역시 중요합니다.
앞선 글에서 알아봤듯이 낮은 온도는 농산물의 호흡과 대사활동을 늦추는 데 도움이 됩니다.
FAO는 농산물을 품목별 안전한 최저온도에 보관하면 호흡률과 수분 손실을 낮추는 것뿐 아니라 에틸렌에 대한 민감성을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무조건 온도를 낮추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3번째 글에서 살펴봤듯이 오이·가지·바나나 같은 저온 민감성 농산물은 지나치게 낮은 온도에서 저온장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에틸렌 관리 역시 온도, 습도, 환기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저장환경과 함께 관리해야 하는 요소입니다.
가정에서는 어떻게 보관하면 좋을까요?
가정에서는 전문 저장시설처럼 에틸렌 농도를 측정하거나 제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선 사과, 바나나, 배, 익어가는 토마토처럼 에틸렌과 숙성이 밀접한 농산물을 상추 같은 민감한 잎채소와 장기간 밀폐된 공간에 함께 두지 않는 것이 간단한 방법입니다.
특히 이미 많이 익은 과일은 별도로 보관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무조건 모든 과일과 모든 채소를 각각 따로 보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품목마다 적정온도와 에틸렌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농산물을 보관하느냐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에틸렌은 나쁜 가스가 아니라 ‘관리해야 할 신호’입니다
에틸렌을 공부하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것입니다.
에틸렌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바나나나 토마토 같은 과일의 정상적인 숙성에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실제 상업적인 후숙 과정에서도 활용됩니다.
문제는 에틸렌이 필요한 농산물과 에틸렌에 민감한 농산물이 같은 환경에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신선식품 저장과 유통에서는
누가 에틸렌을 만들어내는지
그리고
누가 에틸렌에 민감한지
를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핵심만 정리해보겠습니다
① 에틸렌은 식물이 자연적으로 만들어내는 기체 형태의 식물 호르몬입니다.
② 바나나·사과·배·토마토 등 일부 농산물은 숙성 과정과 에틸렌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③ 에틸렌은 무조건 나쁜 물질이 아니며 바나나 등의 상업적인 후숙에도 이용됩니다.
④ 상추는 에틸렌에 매우 민감해 낮은 농도에서도 갈색 반점 등의 품질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⑤ 에틸렌을 많이 만드는 농산물과 에틸렌에 민감한 농산물은 서로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⑥ 에틸렌의 영향은 농도뿐 아니라 노출시간, 온도, 환기, 품목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⑦ 신선식품을 보관할 때는 온도와 습도뿐 아니라 품목 간 에틸렌 호환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본 내용을 연결해보면 신선식품 보관이 생각보다 꽤 과학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호흡 → 수분 손실 → 온도 → 습도 → 에틸렌
이 다섯 가지가 서로 연결되면서 수확 후 농산물의 품질에 영향을 줍니다.
그렇다면 수확한 채소의 품질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현장에서는 가장 먼저 무엇을 할까요?
다음 프레시랩 노트 6에서는 수확 직후 농산물의 열을 빠르게 제거하는 ‘예냉(Precooling)’이 무엇인지, 왜 수확 직후 온도를 낮추는 것이 중요한지 알아보겠습니다.
참고자료
UC Davis — Lettuce (Crisphead, Icebe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