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오후에 밭에서 상추를 수확했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수확한 채소를 만져보면 생각보다 따뜻할 때가 있습니다.
바깥 기온이 높고 햇빛까지 받고 있었다면 채소 자체의 온도도 상당히 올라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확한 채소를 바로 냉장창고에 넣었다고 해서 채소의 중심부까지 곧바로 차가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신선식품의 수확 후 관리에서 아주 중요한 기술 하나가 등장합니다.
바로 예냉(Precooling)입니다.
예냉은 단순히 채소를 차갑게 만드는 과정처럼 보이지만, 신선식품의 품질을 유지하는 콜드체인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예냉이 정확히 무엇인지, 왜 수확 직후 빠르게 온도를 낮춰야 하는지, 그리고 모든 농산물을 같은 방법으로 예냉하면 안 되는 이유까지 알아보겠습니다.
예냉이란 무엇일까요?
예냉은 영어로 Precooling이라고 합니다.
FAO는 예냉을 가공·저장 또는 냉장운송 전에 농산물이 가지고 있는 포장열(field heat)을 빠르게 제거하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포장열’이라는 말이 조금 생소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농산물이 수확 당시 가지고 있는 열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수확하기 전 농산물은 밭이나 온실의 환경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특히 더운 날 햇빛에 노출된 농산물은 주변 기온만큼 또는 조건에 따라 상당히 높은 온도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수확했다고 이 열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수확 직후에는 농산물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열을 가능한 한 빠르게 제거해 품목에 적합한 온도까지 낮추는 과정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게 예냉입니다.
그냥 냉장창고에 넣으면 되는 것 아닐까요?
여기서 가장 먼저 생기는 궁금증입니다.
“어차피 냉장창고에 넣을 건데 굳이 예냉을 따로 해야 할까?”
냉장창고와 예냉시설은 역할이 조금 다릅니다.
일반적인 냉장 저장시설과 냉장 운송차량은 이미 차가워진 농산물의 온도를 유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수확 직후 따뜻한 농산물에서 많은 열을 빠르게 빼내는 작업은 별도의 냉각 능력이 필요합니다.
FAO는 일반 냉장설비가 냉각된 제품을 유지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따뜻한 농산물의 포장열을 빠르게 제거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농산물이 주변의 차가운 공기에 노출돼도 새로운 환경의 온도에 도달하는 데 24~48시간까지 걸릴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냉장보관 = 낮아진 온도를 유지하는 과정
예냉 = 수확 당시의 높은 온도를 빠르게 낮추는 과정
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물론 실제 시설에서는 사용하는 설비와 방식에 따라 두 과정이 결합되기도 합니다.
왜 수확 직후 빨리 식혀야 할까요?
프레시랩 노트 첫 번째 글을 기억하시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수확된 채소는 죽은 물체가 아닙니다.
수확한 뒤에도 호흡과 대사활동이 계속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온도가 높을수록 호흡과 여러 대사활동이 빨라집니다.
FAO는 농산물이 높은 온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수확 후 수명이 짧아질 수 있으며, 빠르게 적절한 저장온도에 도달시키면 호흡·에틸렌 생성·생화학적 및 효소적 반응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수확한 농산물을 높은 온도에 오래 방치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예냉의 핵심은 단순히
“나중에 냉장고에 넣는다.”
가 아니라
“수확 후 가능한 한 빨리 품목에 맞는 온도로 접근시킨다.”
는 데 있습니다.
수확 후 몇 시간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특히 호흡률이 높고 저장수명이 짧은 농산물은 수확 후 온도관리가 중요합니다.
FAO는 호흡이 빠르고 수확 후 수명이 짧은 농산물은 수확 직후 빠르게 냉각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왜 그럴까요?
농산물이 높은 온도에 있는 동안에도 호흡과 노화는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예냉을 늦게 하면 이후 냉장고에 잘 보관하더라도 이미 높은 온도에서 진행된 품질 변화를 완전히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수확 후 관리에서는 처음부터 온도를 제대로 관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예냉이 콜드체인의 출발점으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예냉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농산물을 어떻게 빠르게 식힐까요?
예냉에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방식이 사용됩니다.
저온실 냉각(Room Cooling)
농산물을 냉장실에 넣고 차가운 공기로 천천히 온도를 낮추는 방법입니다.
강제통풍냉각(Forced-Air Cooling)
차가운 공기를 농산물이 들어 있는 포장 사이로 강제로 통과시켜 열을 제거합니다.
수냉식 예냉(Hydrocooling)
차가운 물을 이용해 농산물의 열을 제거합니다.
진공예냉(Vacuum Cooling)
압력을 낮춰 농산물 표면의 수분을 증발시키면서 열을 빼앗는 원리를 이용합니다.
빙냉(Ice Cooling)
얼음이나 얼음물을 이용해 농산물을 냉각하는 방식입니다.
FAO 자료에서도 저온실 냉각, 강제통풍냉각, 수냉식 냉각, 얼음 냉각, 진공냉각 등 다양한 방법을 예냉 방식으로 제시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이 무조건 최고인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농산물에 따라 예냉 방법도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물에 젖어도 문제가 없는 농산물이라면 수냉식 방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물과 접촉하면 품질이나 위생 문제가 발생하기 쉬운 농산물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포장 형태도 중요합니다.
강제통풍냉각을 한다면 차가운 공기가 박스 안의 농산물까지 제대로 지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포장박스에 통풍구가 있어도 적재하면서 구멍이 막히거나 포장재가 공기의 흐름을 차단하면 냉각효율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FAO는 예냉방법을 선택할 때 농산물의 특성, 가치와 품질, 장비와 노동비용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예냉 = 무조건 찬물을 뿌린다.”
또는
“예냉 = 무조건 냉장창고에 넣는다.”
라고 생각하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강제통풍냉각은 왜 빠를까요?
일반 저온실 냉각에서는 차가운 공기가 농산물 주변을 지나면서 서서히 열을 빼앗습니다.
하지만 박스가 여러 개 쌓여 있으면 안쪽 농산물까지 차가운 공기가 빠르게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강제통풍냉각은 팬 등을 이용해 차가운 공기가 포장 내부와 농산물 사이를 지나가도록 강제로 흐름을 만들어주는 방식입니다.
FAO 자료에서는 강제통풍냉각이 일반 저온실 냉각보다 약 4~10배 빠르게 냉각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실제 속도는 공기 흐름, 농산물의 크기와 포장상태 등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 때문에 딸기나 잘 익은 토마토, 피망 등 다양한 농산물에 활용됩니다.
UC Davis 역시 토마토의 수확 후 품질 유지를 위해 빠른 냉각이 중요하며, 강제통풍냉각을 효과적인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잎채소는 왜 빨리 식을까요?
농산물의 모양과 크기도 냉각속도에 영향을 줍니다.
상추처럼 얇고 표면적이 큰 잎채소와 커다란 수박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FAO에 따르면 농산물의 냉각속도는 개별 크기와 노출된 표면적, 농산물과 냉각매체 사이의 온도차, 냉각매체의 종류와 순환 정도 등에 영향을 받습니다.
표면적이 큰 잎채소는 멜론이나 수박 같은 큰 과실보다 훨씬 빠르게 냉각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냉장창고에 넣었다고 해도 모든 농산물의 중심온도가 같은 속도로 내려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 부분이 실제 수확 후 관리에서 중요합니다.
창고의 공기온도만 보고
“냉장고가 5℃니까 채소도 5℃겠지.”
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냉도 무조건 0℃까지 하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3번째 글에서 살펴본 저온장해를 기억해야 합니다.
농산물마다 안전하게 견딜 수 있는 온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상추와 브로콜리처럼 0℃에 가까운 저온이 적합한 농산물이 있는 반면 토마토, 바나나 등은 숙도와 조건에 따라 지나치게 낮은 온도에서 저온장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FAO의 예냉 자료도 딸기와 브로콜리는 어는점에 가까운 낮은 온도가 필요하지만 그런 온도가 바나나·망고·토마토 등에는 손상을 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예냉의 목적은
“최대한 차갑게 만드는 것”
이 아닙니다.
“해당 농산물에 적합한 목표온도까지 빠르게 낮추는 것”
입니다.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예냉 후 다시 따뜻해지면 어떻게 될까요?
예냉을 잘했다고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농산물의 온도를 적절하게 낮췄다면 이후 저장과 운송에서도 그 온도를 가능한 한 유지해야 합니다.
예냉한 채소를 상온 작업장에 오래 두었다가 다시 냉장차에 싣고, 배송 중 다시 온도가 올라간다면 처음 예냉한 효과를 제대로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냉은 독립된 기술이라기보다 콜드체인의 첫 단계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FAO 역시 예냉을 콜드체인의 시작으로 설명하며, 적절한 온도에 도달한 뒤에는 판매될 때까지 그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합니다.
쉽게 표현하면,
수확 → 예냉 → 선별·포장 → 저온저장 → 냉장운송 → 판매
이 과정에서 온도관리가 연결되어야 합니다.
중간에 한 구간이라도 온도가 크게 올라가면 품질 유지에 불리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예냉이라는 개념이 필요할까요?
가정에서 전문적인 예냉시설을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원리는 알아둘 만합니다.
예를 들어 한여름에 장을 보고 뜨거운 자동차 안에 채소를 오랫동안 두었다가 집에 와서 냉장고에 넣는 것과, 구입 후 가능한 한 빨리 적절한 냉장환경으로 옮기는 것은 같은 조건이 아닙니다.
신선식품의 품질은 냉장고에 넣은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수확 이후 계속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UC Davis 역시 신선 농산물의 품질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수확 후 가능한 한 빨리 품목별 안전한 저온까지 냉각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냉을 알면 콜드체인이 이해됩니다
지금까지 프레시랩 노트에서 다룬 내용을 한번 연결해보겠습니다.
1. 수확 후에도 채소는 호흡합니다.
2. 수확 후에는 수분도 계속 잃습니다.
3. 품목마다 안전한 저장온도가 다릅니다.
4. 적절한 상대습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5. 에틸렌을 생성하거나 민감하게 반응하는 농산물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6번째 단계에서 처음으로 이 원리들을 실제 관리기술에 적용했습니다.
바로 예냉입니다.
수확 직후 농산물이 가지고 있는 열을 빠르게 제거해 호흡과 품질 저하를 늦추고, 이후의 저온저장과 냉장운송으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냉은 단순히 “채소를 한번 차갑게 하는 작업”이 아니라 신선식품의 수확 후 품질관리를 시작하는 중요한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핵심만 정리해보겠습니다
① 예냉은 수확한 농산물이 가지고 있는 포장열을 저장이나 운송 전에 빠르게 제거하는 과정입니다.
② 수확한 농산물은 계속 호흡하기 때문에 높은 온도에 오래 노출될수록 품질 유지에 불리할 수 있습니다.
③ 일반 냉장창고와 냉장차는 이미 차가워진 농산물의 온도 유지에 더 적합하며, 따뜻한 농산물을 빠르게 식히는 데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④ 예냉에는 저온실 냉각, 강제통풍냉각, 수냉식 냉각, 진공냉각, 빙냉 등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⑤ 농산물의 특성과 포장방식 등에 따라 적합한 예냉방법이 달라집니다.
⑥ 예냉은 무조건 0℃까지 낮추는 것이 아니라 품목별 안전한 목표온도까지 낮추는 과정입니다.
⑦ 예냉 이후에도 저장과 운송 과정에서 적절한 저온을 유지해야 효과가 이어집니다.
결국 예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차갑게’보다 ‘얼마나 빨리 적절한 온도까지 낮추고, 이후 그 온도를 유지하느냐’입니다.
이제 프레시랩 노트의 첫 번째 기초원리 6편이 모두 연결됐습니다.
호흡 → 증산과 수분 손실 → 보관온도 → 저장습도 → 에틸렌 → 예냉
그렇다면 다음부터는 실제 채소의 품질 변화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프레시랩 노트 7에서는 우리가 상추를 보관하다 흔히 볼 수 있는 현상,
“상추 끝이나 잘린 부분은 왜 갈색으로 변할까?”
를 주제로 갈변이 일어나는 원인과 갈변을 줄이는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참고자료
- FAO — Manual for the Preparation and Sale of Fruits and Vegetables: Precooling
- FAO — Good Practice in the Design, Management and Operation of a Fresh Produce Packing-House
- FAO — Handling and Preservation of Fruits and Vegetables
- UC Davis — Tomato Postharvest Recommendations
- UC Davis — Preserving the Freshness of Produce